맹자

맹자는 전국 시대 추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가(軻)이고, 자는 자여(子輿) 또는 자거(子車), 자거(子居), 자전(子展) 등이다. 어릴 때부터 공자를 숭상하고, 공자의 사상을 발전시켜 유학을 후세에 전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전국시대의 철학자, 정치사상가로 본명은 맹가(孟軻)이다. 맹자는 의를 강조하여 인(仁)의 위치에 같이 놓아둠으로써 공자의 사상을 보충하고 발전시켰다. 우리는 사람답지 못한 행동을 봤을 때, 차마 저렇게까지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그것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만약 권력자가 사람답지 못한 행동을 해서 백성들을 크게 괴롭한다면, 백성들은 그런 윗사람을 끌어 내려도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권력자는 백성들을 위해 정치해야 되고, 백성들은 부당한 권력을 휘두르는 권력자에게 저항한다’는 의로움(義)의 개념은, 사람다움(仁)을 지키기 위해 마땅히 가야할 길로 여겨져서 맹자를 대표하는 핵심 사상이 된다.

주자는 그를 진(秦)나라 이전 유학의 마지막 적통으로 평가했는데, 그 영향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흔히 공자와 묶여 공맹으로 언급되어 유교의 대표 인사로 꼽히고 있다. 때문에 그를 표현하는 호칭 역시 공자에 준하는 ‘아성으로 불린다. 원 문종 3년에 추국아성공으로 추봉되었고, 이것이 현재 성균관 대성전 등지의 공문 사당 위패에 표기되는 공식 존호이다. 라틴어로는 멘치우스(Mencius).그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만장과 공손추 등이 있다.

부당한 권력에 대한 백성의 저항을 옹호하고, “왕의 권력은 백성들이 부여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등 그가 살았던 시대에 비해 매우 진보적인 주장을 하였다. 맹자의 이러한 사상은 계몽주의 이후에 나타나는 사회계약론과 굉장히 닮아 있다. 사실상 근대 서양에서 사회계약론이 태어나기 수천 년 전에 선행해서 등장한 민(民) 본위의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공자가 사망하고 백여년 후 쯤 산둥성 쩌우청에서 맹가가 태어났다. 맹가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어서 편모가정에서 자랐다. 맹가의 어머니 장씨는 아들을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 이사를 세 번 했다는 바로 그 맹모삼천지교와 맹모단기지교로 유명한 현모였고 맹가는 이런 어머니에게 큰 영향을 받아 학교 수업을 마친 뒤 공자의 고향 노나라로 가서 공자의 손자 자사의 문인에게서 공자가 편찬한 육경을 배웠다. 편모가정임에도 자식 교육을 위해서 노력하는 훌륭한 어머니와 좋은 환경 덕분에 그의 재능이 썩지 않을 수 있었으니 축복받은 어린 시절이라고 할 수 있다.

 

맹자의 사상

♦왕도 정치
“왕은 하필 이로움을 말하십니까? 다만 인의만이 있을 뿐입니다.”는 수많은 유학자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킨 말이며, 후대의 모든 유학자들이 이 말을 달고 살았을 정도로 유명한 말이다. 만약 윗사람이 이로움만 쫓게 된다면 아랫사람도 자신의 이로움을 쫓게 될 텐데, 서로 이익을 얻고자 하면 나라의 기강이 무너져서 모두가 큰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는 것. 따라서 윗사람은 ‘친근함(仁)과 공정함을 말함으로써 아랫사람에게 모범을 보여야 되지, 이익을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맹자가 평소에 주장한 왕도정치를 뜻하기도 한다. 왕도정치란, 백성의 안정과 인간다운 삶을 최우선으로 하고, 그 목적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힘에 의한 강제적 해결이 아닌, 통치자의 인격과 덕의 감화에 의한 해결이어야 한다는 것.

♦성선설
모든 사람은 ‘사람답지 못한 행동을 봤을 때,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 이 생기는데, 이러한 마음을 갈고 닦아야 된다는 것. 우리는 외부의 유혹에 의하여 악한 짓을 저지르는데, 이런 유혹이 있더라도 자신의 마음 속에서 ‘차마 저렇게는 못하겠다’는 마음을 키워간다면, 그 어떤 커다란 유혹이 내 앞에서 아른거려도 그 유혹을 쉽게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다. 선한 행위는 단순히 그 ‘선함’을 배운다고 되는 것은 아니며, 선한 행위는 사람의 감정에서 출발해야 보다 더 자발적이게 되고 그 동기는 더욱 강해진다는 것이 맹자의 성선설이다.

당시 제후들은 맹자에게 ‘왕도정치는 도저히 내가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한 맹자의 대답은 단호하다. 당신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존재하는 착한 심성(사단)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잘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 입니다! 제후들의 어떤 변명도 맹자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맹자는 제후들의 핑계를 ‘성선설과 사단’이라는 논리를 통해 분쇄시켰던 것이다.

 

♦호연지기
자신의 마음에 떳떳해서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의롭다고 생각되면 저절로 당당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 의로움의 옳고 그름이, 내 마음에 조금이라도 들지 않는다면 어찌 당당해질 수 있겠는가. 의로움은 ‘외부 환경’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내가 행한 행동이 내 마음 ‘내부’에서 한점 부끄러움이 없을 때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의로운 행동과 마음을 쌓다보면 어떤 상황에 놓여 있어도 내자신 스스로가 부끄럽지 않기 때문에 떳떳하고도 넓은 마음을 지니게 되는데, 이 사람의 당당한 기운을 일러 ‘호연지기’라고 말한다. 부끄러울 것이 하나도 없는데 어찌 당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역성 혁명론
유교적 민본주의(民本主義)를 설명할 때 가장 자주 인용되는 대목이다. 맹자는 왕 앞에서 대놓고 ‘잘못된 왕은 갈아 엎어야 한다’, ‘백성을 착취하는 왕과 관료들은 도둑놈이다’ 라는 말을 서슴없이한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모든 정치 권력과 종교 권력의 권위를 마냥 인정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면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단순히 최대다수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공리주의가 아니라, 통치의 정당성은 어디까지나 백성의 복지에 있다는 말이다. 맹자가 굉장히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가 “좋은 것을 독점하지 말고 최대한 많은 백성들과 함께 하라”는 것이었다. 특히 천(天)을 백성과 동일시하여 천명(天命)의 개념을 인문주의적으로 뿌리박았고, 이 천명이 바뀌는(革) 기준을 민심으로 규정하여서 민본(民本)의 개념을 정치의 축으로 세웠다. 또한 이런 백성을 위한 정책도 말하였는데, 맹자는 정전제를 통하여 어떻게 민생을 구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지에 대한 계획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 시대에 맹자의 민본 사상이 중요한 까닭은, 민(民)과 천(天)을 동일시하면서 국가의 정통성에 있어서 “민심”을 중시하도록 만들어 놓은 데 있다. “민심을 따르지 않으면 권력자가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은 민주주의가 대세가 되기 이전에는 찾아보기가 어려운 사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