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공자는 노나라에서 태어나 자랐고, 어려서부터 예(禮)에 밝았다. 30대부터 제자 양성을 시작했고, 50대에 이르러 노나라의 중도재를 지냈는데 잘 다스렸다. 이에 노나라 정공의 신임을 얻어 지금의 법무부장관격에 해당하는 대사구大司寇의 벼슬까지 제수받았다. 중앙정계에 들어온 그는 노나라의 세 권세가인 삼환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과업을 맡았으나 끝내 좌절되었고, 그는 실각하였다. 자신의 이상이 노나라에서 실현될 수 없음을 안 공자는 이후 여러 제자를 이끌고 13년 동안 중국 천하를 방랑하며 뜻이 맞는 군주를 찾았지만 이 역시 좌절되었다. 말년에 노나라로 귀국하여 국로의 대접을 받았으나 역시 등용되지는 못하였다. 이후 제자 양성과 고문헌 정리에 힘쓰다 세상을 떠났다.

정치적으로는 삼황 오제의 이상적 정치와 조카를 왕으로서 성실하게 보필한 주공 단의 정치 철학을 지향했다. 뜻을 펴려고 전국을 주유하였으나, 그의 논설에 귀를 기울이는 왕이 없어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다 생을 마쳤다. 춘추시대에 서주의 제후국인 노나라의 무관인 숙량흘의 둘째 아들이자, 서자로 태어났었다.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이다.

“공자(孔子)”의 호칭에서 “자(子)”는 성인을 부르는 존칭이다.그 뒤 여러 번 추증되어 대성지성문선왕에 추봉되었다.

 

공자의 사상

공자의 중심 사상은 그가 제자들과 나눈 문답 형식의 언행집인 《논어》에 들어 있다. 이를 요약하면 인간이 취하여야 할 모든 행동의 궁극적 지향점은 인(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체로는 지덕(至德), 지선(至善)의 뜻을 지니고 있는 인도주의로서, 정치적으로는 명분을 바르게 하고,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부모는 부모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각자가 본분을 지킴으로써 국가와 가정의 질서를 유지시키며, 사회적으로는 자기의 도리를 다하고, 남을 부축하며(推己), 자기가 싫은 것은 남에게 강악하지 않는 것을 비롯한 제덕으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이 하기 싫은 것,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을 강악이라 하여 악으로 간주했다.

인(仁)을 지향하고 예(禮)에 정진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군자요, 그렇지 못한 사람이 소인이자 악인으로서 군자가 덕을 생각할 때 소인은 이익만을 생각하며, 악인은 타인에게 해를 끼쳐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행한다. 또한 그는 ‘군자는 두루두루 소통하되 끼리끼리하지 않고, 소인은 끼리끼리하되 두루두루 소통하지 않는다.’ 라 설파하였다.

인간은 성인과 군자 외에도 인간적으로 범인과 소인, 악인으로 구분하여 생각하였다. 그러나 인은 성인만이 능히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자신도 외경(畏敬)할 만큼 이루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은 예에 엄격하여 절도가 있었으며, 성품은 엄숙·온화·원만하였다.제자를 교육함에 있어서는 각인(各人)의 능력과 이해 정도에 따라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성품을 계발하도록 유도하였다. 사상이 현실적이고 현세적이었으며, 실용적, 합리적, 상식적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공자가 활동했던 시기의 은자(隱者)들의 평가는 사뭇 달랐다. 《장자》에서 도척이 공자에게 하는 말이나 ‘논어’ 18:7에서 노인이 공자에 대해서 ‘팔다리로 부지런히 일도 하지 않고, 오곡도 분간하지 못하는데, 누가 선생님이란 말이오?’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생산활동을 도외시하고 결과[利]보다는 뜻[義]를 고려하는 태도에 회의적이였던 의견들이 당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생산활동을 하지 않는 사(士)계급에 대한 비판은 법가에서도 드러난다.

 

공자의 철학

공자의 군자교육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인’이였다. 공자 사상의 핵심인 ‘인(仁)’은 하나의 문장으로서 명백히 개념이 규정되지는 않았으나, 대체로 박애,도(道),덕,선 등의 뜻을 지니고 있는 심오한 휴머니즘으로서, 정치적으로는 이름을 바르게 하고, 이에 따라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책임과 본분을 다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 사회 생활에 있어서는 자기의 도리를 다하고남을 부축하며, 내가 싫은 것은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을 비롯한 여러 가지 덕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인을 지향하고 예에 정진하는 사람이 군자요, 그렇지 못한 사람은 소인으로 규정했다. 군자가 덕을 생각할 때 소인은 이익만을 생각하며, 군자가 보편적임에 비하여 소인은 상대적이라고 역설, 인간을 인간적으로 구분하였다.

‘인’은 공자가 생각하는 인간의 최고는 도,덕(德)이었다. 덕이란 인간에게서 기대되는 개개인의 훌륭한 자질이라고 중국인은 생각하며, 동시에 그것은 영향력 내지는 인격력으로서 남에게 감화를 미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인의 정치사상에서 근간을 이루는 덕치주의 내지 정치에서의 도덕중심주의의 근거라고 하겠으며, 공자의 정치사상 근저에도 이 같은 기대가 있었다.

그는 당초 위정자 특히 최고 권력자인 군주에게 기대를 걸어 각국을 편력하면서 자기의 사상을 설명했다. 군주가 덕으로써 백성을 다스리고 이에 따라 백성의 덕도 높아져 그 결과로서 도덕이 고루 퍼진다면 온 세상이 저절로 평화로워진다는 것이 공자의 정치사상이었다. 그러나 이 사고방식은 난세 아래의 제후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에게 ‘인’을 터득하게 함으로써 학식과 함께 인격적인 ‘덕’을 겸비하는 군자가 되도록 하고, 그들을 장래 정치의 요직에 나아가게 함으로써 난세를 전쟁이 아니라 평화적 방법으로 평정하려 했던 것이다. 사상이 현실적이고 상식적인 듯하면서도 매우 심오하며, 제자들을 교육하는 데 있어서도 개인의 능력과 이해도에 따라 적합한 방법으로 유도하여 성품을 개발시켰다. 또한 그 자신은 예에 엄격하여 절도가 있었고, 엄숙, 온화, 원만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공자가 예에 대해서 말하기를 ‘사람이 어질지 못하면 예의가 무슨 소용이겠는가!’라 하였으며 또한 공자와 자하의 대화에서 채색은 흰 바탕이 있은 연후에야 가능하다는 비유를 들어 예의 근본에 대해 강조한 것에 따르면 공자의 ‘예’는 외면적 사회규범의 측면도 가지지만 그 바탕에 정직한 마음(直)이 있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백성을 중시하고 인간의 심미적 부분을 존중하는 것은 유교가 공자 사상의 장점이다. 반면 존비친소적 규범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유가의 삼년상이 대표적인 예이다. 공자는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을 다하기 위해 삼년상을 치르는 것이 사람의 도에 맞다고 여겼는데, 묵자의 사상을 지지하는 비판자들은 삼년상이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허례허식이며, 그와 같은 관념이 백성들의 이익을 저해한다고 주장하였다.

공자 사상과 묵자 이론은 존비친소적 규범에 관한 부분은 차이가 있으나, 본질적 이상의 차이라기보다는 방법론적 차이이다. 공자, 묵자의 사상을 서양 철학으로 분류하면 유심론에 가깝기 때문에 공유되는 부분도 존재한다.

 

 

공자의 주요 제자

♦안회 – 논어에서는 공자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수제자로 나온다. 공자가 가장 아끼던 제자로 일찍이 공자가 ‘나는 그가 진보하는 것만 보았지 정체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46]고 말한 적이 있지만, 공자보다 일찍 죽는다. 안회의 죽음을 들은 공자는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라고 탄식하며 슬퍼했다.

♦자로 – 논어에서는 무골(武骨)에다가 성격도 드센 전형적인 호걸형 인물로 나온다.또한 대부의 가신을 지낼 만큼 정치적 능력도 상당했다. 공자에게 면박을 많이 받지만 칭찬도 받고 공자와의 인간적인 관계가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후에 위(衛)나라 공실의 권력다툼에 휘말려 살해당하고 그 시신이 젓갈로 담겨진다.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한 공자의 행동이 자기 집의 젓갈을 모두 버리는 것이었는데 이 것이 공자식인설이라는 루머로 퍼졌다. 안회와 더불어 공자에게 가장 중요한 제자였는데 자로가 죽은 소식을 듣고 안회와 마찬가지로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외쳤으며 자로가 죽은 다음해에 공자도 사망했다.

♦자공 – 논어에서는 머리가 비상하고 언변에 뛰어나며 장사에도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걸물로 나온다. 굉장한 부자였는데, 이 재산으로 공자학단을 경제적으로 후원하였다. 공자가 세상을 떠났을 때 무려 6년상을 치렀을 만큼 공자에 대한 존경심이 엄청났다.

♦증자 – 공자에게서 우직하지만 아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실 나이 차이가 거의 50살이나 나서 공자 사망 당시 20대였기에 공자와 대화하는 내용에서는 거의 나오지 않고 오히려 증자의 아버지인 증점이 더 많이 등장한다. 다만 논어가 증자계파에서 완성되었다는 설이 주류적일 정도로 논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꽤 있는 편이다.

이 중에서 제일 언급이 많이 되는 제자는 안회, 자로, 자공이며, 이 3명은 공자 제자의 삼대장이라고 할만하다. 안회는 어질고 똑똑하며 지혜롭고, 자로는 힘이 쎄고 장군감이어서 용감하며, 자공은 상인 출신이라 돈이 많아서 공자가 힘들 때 물질적으로 많이 도와주었으며 인맥이 넓었다.